여러 달 전이었다. 그녀에게 처음 속은 것은.
그녀는 큰 키와 늘씬한 몸매에 목소리도 상냥하고 매력적이다.
항상 올림머리를 하고 앞치마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그녀는
우리 내외가 매번 장보러 가는 마트의 와인코너 담당자다.
그 모든 것이 그녀의 장점이지만, 그녀의 와인 추천 만은 (적어도 나에게는) 별로였다.
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더 속았다.
매번 묻지 말고, 듣지 말고, 내 느낌대로 고르겠다고 다짐하지만, 나는 종종 그녀에게 속고 만다.
그저 주말 저녁 식탁을 위한 소박한 와인을 고르는 것이니 뭐 특별나게 좋은 와인을 고르는 것도 아니건만
나는 꼭 그녀의 추천을 귀담아 듣고 만다. 그리고 저녁이 되면 후회를 하는 것이다.
아마도 마트표 와인이라는 것들이 추천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낮은 수준의 것들일지는 모르지만
그래도 내 경험으로는 저가의 마트 와인 중에도 하루 저녁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 많이 있었기에 와인 고르기와 즐기기를 계속한다.
단지, 오늘 처럼 또 그녀에게 속은 날이면 이런 저런 와인을 경험해 보는 게 피곤해진다.
그냥 지난 번에 좋았던 그놈을 다시 살 걸 하는 후회를 하게 된다.
오늘의 실패작!
Ph. Bouchard & Cie
Syrah
Vin de Pay d'Oc
2006
Languedoc-Roussillon
AOC가 아니어도 잘 고르면 나름 개성 있는 와인들이 있다는 책속의 가르침을 따라서 한 번 선택해 봤는데...
내가 경솔하게도 (그녀의 추천에 솔깃해서는) 기성 시스템을 너무 쉽게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게 해줬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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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늘 우리 나가수 요정 박정현이 멋있게 불러준 "우연히"는 좋았다.
묻혀있던 좋은 노래를 오랜만에 찾아 들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고, 그것으로 대신 위로 삼는다.
에팔레치아 산간에서 울릴 듯한 블루스 풍의 기타소리가 머리에 맑은 공명을 전해준다.
["우연히," 이정선, 30대, 1985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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